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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식을 하는 진짜 이유, 돈 말고도 있다

  주식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돈 벌려고. 수익 내려고. 노후 대비하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다. 실제로 주식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조금 다른 이유들이 튀어나온다. 첫 번째 이유, 돈을 ‘일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월급은 한계가 있다. 시간을 갈아서 돈을 버는 구조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는 24시간이고 몸은 하나다. 그래서 주식을 한다. 내가 안 움직여도 돈이 움직이게 만들고 싶어서. 이게 주식의 가장 현실적인 이유다. 두 번째 이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주식을 하면 뉴스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금리, 환율, 전쟁, 선거, 산업 정책. 예전엔 그냥 흘려보내던 것들이 갑자기 전부 내 문제처럼 느껴진다. “아 이게 이 회사랑 연결되는구나” “그래서 주가가 이랬던 거구나” 주식은 돈을 걸고 배우는 사회 수업 에 가깝다. 세 번째 이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는 불안감 이건 좀 솔직한 얘긴데 꽤 많은 사람이 이 이유로 시작한다. 월급만 모아서는 집도, 차도, 미래도 점점 멀어지는 느낌. 주변에서 누군가는 수익 냈다 하고 누군가는 배당 받았다 하고 누군가는 이미 자산을 불리고 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네 번째 이유, 선택과 책임을 직접 지고 싶어서 주식은 누가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 오르면 내 선택이고 떨어지면 내 판단이다. 처음엔 이게 무섭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게 매력으로 바뀐다. 남 탓할 수 없는 구조 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감각. 이게 사람을 꽤 단단하게 만든다. 다섯 번째 이유, 생각보다 ‘재밌어서’ 한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기업 분석하고 차트 보고 실적 확인하고 시장 흐름 읽는 거. 사람에 따라선 게임보다 더 재밌다. 물론 잃을 땐 지옥이지만 잘 풀릴 땐 묘하게 성취감이 있다. 그럼에도...

영포티 논란, 정말 문제는 ‘비판’이었을까

영포티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부터 봐야 한다 영포티. Young Forty. 이 단어가 처음부터 “40대는 다 문제다” 이런 의미로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핵심은 나이 가 아니라 태도 다. 자기 나이를 부정한 채 20대 문화에 무리하게 끼어들고, 20대 여자에게 “나 아직 젊어”라는 착각을 강요하고, 상대가 불편해해도 그걸 감각으로 못 느끼는 사람들. 클럽, 술자리, 소개팅, 회사 회식 자리에서도 선 넘는 농담, 선 넘는 스킨십, 그리고 항상 붙는 말. “요즘 애들은 예민해” 이런 행동을 풍자하려고 영포티라는 단어가 나온 거지 40대 전체를 조롱하려고 만든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는 좀 이상하다 요즘 보면 영포티를 비판하면 바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그거 나이 혐오 아니야?” “세대 혐오 조장하지 마라” “왜 특정 집단을 조롱하냐” 문제는 행동에 대한 비판 이 어느 순간 존재에 대한 혐오 로 둔갑한다는 거다. 누군가가 “40대 남성이 20대 여자에게 츄파춥스를 던지는 게 이상하다” 라고 말하면, 그다음 반응은 이렇다. “40대 남자들 다 그런 줄 아냐?” “너가 더 혐오자다” 아니, 잠깐만. 아무도 “다 그렇다”라고 안 했다. 이상한 행동을 지적했을 뿐인데, 왜 화살이 바뀔까 이 구조가 묘하다.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은 사라지고, 그 행동을 말로 설명한 사람 이 갑자기 문제 인물이 된다. 영포티라는 단어가 불편한 사람들은 정작 왜 그 단어가 생겼는지는 관심 없다. 그저 “기분 나쁘다” “내 또래가 욕먹는다” 이 감정만 남는다. 그러다 보니 논의의 초점이 완전히 엇나간다. ✔ 불편한 접근 ✔ 권력 차이에서 나오는 갑질 ✔ 나이를 방패 삼은 무례함 이건 다 증발하고 오직 단어 하나만 잡고 늘어진다. 혐오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이고 있다 요즘은 진짜 이상한 흐름이 있다. 누군가의 문제 행동을 지적하면 그 순간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나. 행동을 비판하는 건...

간호사 의사 갈등, 그리고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사이의 아이러니

  간호사는 왜 의사에게는 불만을 말하면서 간호조무사에게는 같은 태도를 반복할까 병원 얘기를 조금만 들어보면 비슷한 말이 자주 나온다. “간호사는 의사에게 너무 휘둘린다.” “의사 중심 구조가 문제다.” 실제로 간호사들이 받는 노동 강도나 책임에 비해 대우가 충분하냐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여기까진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근데 이 얘기를 병원 안에서 한 단계만 내려가서 보면 묘한 장면이 나온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사이의 관계다. 의사–간호사 관계에서 느끼는 그 위계, 그 거리감, 그 말투. 그게 간호사–간호조무사 관계에서도 꽤 비슷하게 반복된다. 이걸 누군가의 인성 문제로 보면 이야기가 너무 쉬워진다. 근데 구조를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간호사는 의사에게는 명확히 약자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는 동시에 전문직이고 기득권 이기도 하다. 이 두 위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간호사는 의사 앞에서는 억울함을 말하고, 아래 직군 앞에서는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게 된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냥 “업무 분장”이고 “책임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근데 듣는 쪽에서는 다르게 느껴진다. 아이러니한 지점은 여기다. 간호사가 의사에게 요구하는 건 존중, 처우 개선, 수직 관계 완화다. 그런데 같은 논리가 간호조무사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이미 누리고 있는 위치는 권리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 일 거다. 사람은 참 묘하다. 자기가 가진 혜택은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만 차별로 인식한다. 의사가 나를 무시하면 구조적 문제라고 느끼지만, 내가 누군가를 통제하면 업무상 필요라고 생각한다. 이게 꼭 간호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패턴은 거의 모든 조직에서 반복된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그렇다. 한 단계 위에서는 억눌리고, 한 단계 아래에서는 같은 방...

전세계적으로 1020 우파가 늘어나는 이유

 요즘 10~20대가 보수가 되는 이유 이상해서가 아니라, 계산해보면 그렇다 요즘 보면 20대, 심지어 10대 남성층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꽤 높게 나온다. 예전엔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다. 젊으면 진보, 나이 들면 보수. 이 공식이 거의 상식처럼 굳어 있었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처음 보면 이상해 보인다. 근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다. 먼저 전세계 얘기부터. 미국, 유럽 쪽에서도 젊은 남성층이 점점 보수적이거나 우파 성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있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 게임 문화,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서 이 현상이 더 뚜렷하다. 이건 특정 국가 문제라기보다는 세대가 처한 환경 문제에 가깝다. 지금 10~20대는 성장기 내내 이런 말을 들어왔다. “기회는 평등하다.” “노력하면 된다.” “차별을 없애야 한다.” 근데 현실에서 느끼는 건 좀 다르다. 열심히 해도 보상은 잘 안 보이고, 경쟁은 계속 늘어나고, 기회는 이미 선점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사람은 ‘이념’이 아니라 내가 손해 보느냐 아니냐 로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나온다. 요즘 보수 정당은 젊은 층에게 이렇게 들린다. “공정하게만 하자.” “특혜는 없애자.” “룰만 지키자.” 이 메시지는 이념적으로 깊지 않다. 근데 직관적이다. 손해 보기 싫은 사람들한테는 꽤 설득력 있다. 반대로 진보 담론은 요즘 젊은 층에게 조금 다르게 들린다. ‘약자 보호’, ‘구조적 문제’ 같은 말들이 어떤 사람들에겐 “나는 계속 설명해야 하는 입장”으로 느껴진다. 특히 경쟁에서 밀릴까 불안한 사람들일수록 이 감정이 강하다. 그래서 묘한 현상이 생긴다. 진보가 말하는 정의가 누군가에겐 내 몫을 줄이는 논리처럼 들린다. 한국에서는 이게 더 세게 작동한다. 취업은 빡세고, 집은 멀어지고, 미래는 잘 안 보인다. 이 상황에서 “조금만 더 참아라”, “사회적 책임을 져...

요즘 대한민국에 쌀숭이들이 늘어나는 이유

  요즘 쌀먹 청년들이 늘어나는 이유 솔직히 말하면, 이상한 선택은 아니다 요즘 “쌀먹 청년”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게임 아이템이나 게임머니 벌어서 그걸 현금으로 바꿔 먹고사는 사람들. 밖에 나가서 일 안 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고 보면 대부분 반응은 비슷하다. “저게 무슨 생산이냐.” “시간 낭비 아니냐.” 근데 가만히 보면 이걸 개인 문제로만 보기도 좀 애매하다. 사실 쌀먹이라는 게 뭔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은 아니다. 게임 안에서 돈을 벌고, 그걸 현실 돈으로 바꾼다. 현실 세계에 남는 게 있냐고 물으면 딱히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점 이다. 요즘 청년들이 느끼는 현실은 굉장히 단순하다.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잘 안 보인다. 월급은 오르긴 하는데 집값, 전세, 물가는 그 속도를 그냥 넘어선다. 이러면 계산이 이렇게 바뀐다. “버텨서 뭐가 되지?” 이 질문부터 나온다. 정규직, 커리어, 성장. 이런 말들 이제는 너무 추상적이다. 눈앞에 있는 건 지금 당장 통장에 찍히는 돈이고, 이번 달을 넘길 수 있느냐는 문제다. 쌀먹은 여기서 꽤 솔직한 선택이다. 큰 꿈도 없고, 대단한 보상도 기대 안 한다. 그냥 오늘을 버티는 방식 이다. 그리고 또 하나. 쌀먹은 적어도 “시도해볼 수는 있는 선택”이다. 학벌도 필요 없고, 자격증도 필요 없다. 실패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면접에서 떨어지는 굴욕도 없고, 상사 눈치도 없다. 이게 생각보다 크다. 많은 청년들이 노동 그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노동 이후에 남는 게 없는 구조 에 지쳐 있다. 8시간, 10시간 일해도 남는 건 피로랑 허탈감뿐이면 사람은 계산을 하게 된다. “차라리 집에서 내 시간이라도 갖자.” 쌀먹은 그 계산의 결과다. 물론 이 선택이 건강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불안정하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게임이 망하면 끝이...

미국에선 아직도 트럼프가 인기 많은 이유

  미국에서 트럼프가 계속 지지받는 이유 솔직히 말해서, 겉으로 보는 이미지랑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 트럼프 얘기 나오면 대부분 반응이 비슷하다. 말 함부로 하고, 트위터로 사고 치고, 외교적으로도 좀 우스꽝스러운 사람. 솔직히 나도 예전엔 그렇게만 봤다. 근데 하나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 문제가 많다는데 왜 미국에서는 계속 지지율이 유지될까. 이걸 이해하려면 트럼프 개인부터 보면 안 된다. 미국 사회부터 봐야 한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산층이 무너졌고, 공장은 해외로 나가고, 돈은 위로만 쌓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정치는 우리 얘기 안 한다” 이렇게 느끼게 됐다. 이게 꽤 오래 쌓였다. 생각보다. 트럼프는 이 틈을 정확히 찔렀다. 말을 예쁘게 안 했다. 정치인처럼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좀 막 말했다. 근데 그게 먹혔다. 저 사람은 적어도 포장 안 한다 , 이렇게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기존 정치인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동안 트럼프는 그냥 질렀다. 이 차이가 컸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미국인들은 대통령을 이렇게 본다. “말이 좀 개판이어도 내 생활이 나아지면 된다.” 트럼프 재임 시절 경제 지표가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체감이 나빴다고 보기도 어렵다. 실업률, 주식시장, 기업 환경. 적어도 망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건 미국 유권자들한테 꽤 중요하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보면 트럼프 외교는 무례하고 즉흥적으로 보인다. 근데 미국 안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여진다. “우리 대통령이 미국 손해 안 보게 하려는 거다.” 동맹국이든 뭐든 미국부터 챙기겠다는 태도. America First 라는 말이 촌스럽지만, 미국인들에겐 직관적이었다.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도 지지층이 안 무너진 이유도 있다. 트럼프는 계속 공격받았다. 언론, 사법, 정치권에서. 근데 이게 역설적으로 지지층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저렇게까지 두...

대학 입시 학폭 반영이 코미디인 이유

 미성년 범죄는 지워진다면서, 왜 학교폭력만 끝까지 따라다닐까 우리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미성년 시절의 잘못은 성인이 되면서 정리해주자 는 원칙이다. 그래서 소년범에게는 소년법이 적용되고, 형사 전과 역시 일정 시점이 지나면 기록에서 사라진다. 이건 단순한 관용이 아니다. 성장은 가능하다는 전제 , 그리고 재기의 기회를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합의 다. 그런데 요즘 대학 입시 제도를 보면 이 원칙이 유독 한 영역에서만 무너진다. 바로 학교폭력 이다. 학교폭력 조치는 학생부에 기록되고, 대학 입시에서 직접적인 불이익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이 기록 하나 때문에 대학 수시 지원조차 못 하거나, 합격선에서 탈락한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같은 미성년 시절의 범죄 인데, 소년범으로 살인·강도·성범죄를 저질러도 소년법 적용을 받으면 대학 입시에서 그 기록은 반영되지 않는다. 반면 학교 안에서 발생한 폭력은 수년이 지나도,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도 입시에 그대로 영향을 준다. 살인은 되는데, 학폭은 안 된다. 이게 과연 말이 되는 구조일까. 이쯤 되면 이 제도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 방식의 문제 처럼 보인다. 법원 기록은 보호되고, 생활기록부 기록은 끝까지 남는다. 범죄의 무게가 아니라 어디에 적히느냐가 인생을 가르는 기준 이 된 셈이다. 이건 처벌의 형평성도, 교육의 논리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이 제도가 미성년자에게 주는 메시지다. 한쪽에서는 “너는 아직 어리니까 다시 기회를 줄게”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너의 기록은 끝까지 따라다닐 거야”라고 말한다. 같은 나이, 같은 미성년자에게 완전히 다른 기준을 들이대는 셈 이다. 이중적이다. 물론 학교폭력의 피해는 가볍지 않다. 피해자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방식이 가해자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닫아버리는 형태...

모욕죄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

우리나라의 모욕죄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정말 필요한가 모욕죄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우리나라 형법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표현 규제 조항이다. 개인의 명예를 보호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들이 과연 지금의 민주사회에서도 여전히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보장하는 미국의 제도와 비교해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왜 ‘사실을 말한 것’을 처벌하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말한 것 자체가 범죄가 되지 않는다 .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해당 발언이 허위 여야 한다. 특히 공인에 대한 발언의 경우 기준은 더 엄격하다. 발언자가 그 내용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퍼뜨렸거나, 진실 여부를 무모하게 무시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1964년,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New York Times v. Sullivan) 판결을 통해 확립되었다. 미국 사회는 이 판결을 계기로 하나의 분명한 선택을 했다.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없는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 을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한국의 구조는 왜 문제인가 반면 우리나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을 말했더라도 , 그 발언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되면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이 구조에서는 권력자나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막기 위해 형사 고소를 선택하기가 매우 쉬워진다. 결국 진실을 말한 사람이 오히려 법적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 이 만들어진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조용해진다. 비판은 줄어들고, 문제 제기는 사라진다. 말하는 사람보다 침묵하는 사람이 더 안전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자유’다 표현의 자유는 듣기 좋은 말만 보호하기 위한 권리가 아니다. 불편한 말, 거친 말, 듣기 싫은 말까지 포함해서 지켜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물론 무분별한 인신공격이나 허위 사실 유포는...

교황제는 신분제의 잔재인가

현대 시대에 교황의 존재는 정말 필요한 걸까? 성경을 살펴보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존재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번의 희생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사했으며, 이로 인해 제사장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 이외에는 모두 평등한 존재라고 말하며, 신자 개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교황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태복음 16:18)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근거로 교황직의 정당성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교황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심지어 죄를 사하는 고해성사 제도를 통해 신자들의 영적인 삶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신분제도를 연상케 한다는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신약 성경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땅에서 ‘랍비’라 불리지 말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이시요, 너희는 모두 형제니라.”(마태복음 23:8)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신앙 안에서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하지만 교황은 교회의 최고 권위자로 군림하며, 심지어 ‘무류성(교황이 신앙과 윤리에 관한 선언을 할 때 오류가 없다는 개념)’까지 인정받고 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과 어긋나는 것 아닐까? 또한, 교황과 성직자들이 죄를 사하는 고해성사 제도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라고 말한다. 즉,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 직접 구하는 것이지, 인간 중 한 명인 성직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사제들이 중재자 역할을 한다...

무한리필의 역설: 무한리필 집이지만 무한리필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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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는 당신은, 무한 리필 초밥 집에서 무려 170 접시를 먹고 쫓겨난 3명 의 남성들에 대해 알고 있는가? 무한리필 초밥집에서 3명이 170접시를 먹고 쫓겨난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다.  계산해보면 1인당 약 57접시를 먹은 셈인데, 보통 초밥 한 접시에는 1~2피스가 올라간다. 그런데 해당 손님들이 비싼 초밥만 골라 먹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부분 1피스짜리 초밥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실제로 먹은 초밥의 양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1명이 170접시를 먹었다고 해도, 나는 그 손님을 진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한리필 가게의 비즈니스 모델은 단순하다. 적게 먹는 손님과 많이 먹는 손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어떤 손님은 몇 접시만 먹고 가고, 어떤 손님은 최대한 많이 먹는다. 이런 균형을 통해 가게는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이 먹는 손님이 나왔다고 해서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무한리필의 기본 개념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닐까? 손님들은 음식값으로 책정된 금액을 지불하고 무한리필을 이용한다. 그런데 이번 경우, 그들이 먹은 초밥의 가격이 5만 원을 훌쩍 넘었다는 이유로 사장은 이들을 쫓아냈다. 그렇다면 반대로 1~2만 원어치만 먹고 가는 손님들에게도 차액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세상 어떤 음식점 사장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결국 사장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무한리필을 제공하면서 특정 조건을 요구하려면, 애초에 제한을 걸거나 정책을 명확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1인당 최대 몇 접시까지만 제공’이라든가, ‘고급 초밥은 1인당 몇 개 제한’ 같은 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런 명확한 규칙 없이 단순히 손님이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가게에서 내쫓았는데, 꼴에 무한리필 이라고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손해도 보기 싫었던 사장의 얄팍한 수를 볼 수 있다. 더불어 무한리필의 취지를 생각해보자. 소비자는 “마음껏 먹...

난타의 진실

난타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 중 하나로, 유쾌하고 흥미 로운 퍼포먼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 또한 난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지만, 난타 공연을 아직  미성숙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강력히 반대한다. 미성숙한 어린이 관객들에게 난타 공연은,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크게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는 난타 공연의  단점  대해서 나열하며 내가 왜 이토록 반대하는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내가 이 블로그를 만든 이유

 내가 블로그를 만든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 중에 첫 번째 이유로는, 바로 블로그에선 내 의견을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었다. 나는 이미 여러 블로그를 몇 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었고 지금도 운영하고 있지만 아까 말했던,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였다. A제품이 있다고 하면 고소 때문에 A제품에 대한 솔직한 나의 생각을 쓸 수 없었고, 또한 정치적인 이야기 또한 선뜻 피력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네이버 블로그나 티스토리 보다는 상대적으로 개인정보에 민감한 구블을 택했다. 유튜버 사망여우님을 보면서 이렇게 구글 플랫폼의 구글 블로그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내가 블로그를 키우는 궁극적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지만 그 역할은 이미 네블과 티블이 하고  있기 때문에 방금 새로 만든 이 구글 블로그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제 오늘부터 새로운 도전이다. 이 블로그도 꽤 크게 키워보려고 한다.